1973년 11월 18일 빛에 안기어 (Embraced By The Light)
1973년 11월 18일 빛에 안기어 (Embraced By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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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1월 18일 빛에 안기어 (Embraced By The Ligh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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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은 1973년 비회원인 베티 이디라는 여성이 경험한 사항이며, 서울 남 스테이크의 이상태 형제님(성균관대 생물학과 교수)이 번역하신 소 책자 내용입니다. 아래 김경지 형제님이 올리신 히버 큐 헤일 보이스 스테이크 회장의 시현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 참고삼아 올립니다.
기술된 베티 이디 여사의 경험 가운데는 우리 교회의 교리와 맞지 않는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부분에 대한 설명이 영문으로 끝 부분에 첨부되어 있습니다. 회원 여러분들께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버릴 것은 버리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빛에 안기어
베티 이디(Betty J. Eadie) 저 책머리에 나는, 10년동안 의학적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아이들과 어른들을 면담하며 근사경험(近死經驗, near-death experience)에 대해서 연구해 왔습니다만, 내 인생의 어떤 경험에서보다 "빛에 안기어"를 읽음으로써 근사경험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빛에 안기어"는 외과수술중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베티 이디 여사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생의 의미를 알려주는 생생한 여행기입니다. 나는 심장마비로 죽었다 살아난 한 소년이 그의 부모에게 한 말을 기억합니다. "저는 부모님께 말씀드릴 놀랄만한 비밀이 있어요. 하늘에 오르는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거든요." 그 어린이는 너무 어려서 그가 뜻하려는 바를 잘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이 책도 똑같은 기이한 비밀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은 후의 생에 대한 비밀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비밀인 것입니다. 근사경험은 사실 죽음에 대한 경험입니다. 우리는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살인자거나, 성스런 사람이거나 모두 죽을 때가 되면 이 경험을 할 것입니다. 나는 우리가 죽으면, 암흑속으로 들어가고 인생은 끝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중환자를 돌보는 의사로서 나는 많은 어린이와 어른들이 죽는 것을 보아왔고, 죽음에 대해 이외의 다른 생각은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죽음의 과정이 즐겁고 영적이란 사실을 알게된 것은 내가 수술중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로부터 무슨 경험을 했는지를 듣기 시작한 이후였습니다. 생이 끝나면 어둠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스런 빛이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한 어린이는 이 빛에 대해 "그안에 훌륭한 것들이 많이 많이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근사경험은 뇌의 산소결핍이나, 약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에 의해 생기는 심리적인 불안감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경험은 거의 20년간의 과학적인 연구로, 자연적이고 정상적인 과정이란 자료가 많이 축적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뇌의 한 곳에 이런 경험을 하도록 하는 부위가 있다는 증거도 갖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근사경험이 절대적인 사실이고 마음속의 환상이 아니란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경험들은 다른 인간의 능력처럼, 수학처럼, 언어처럼 사실인 것입니다. 워싱톤대학과 시애틀아동병원의 연구팀이 미국 소아과의학협회지에 이에 대한 내용을 실은 것은 불과 8년전입니다. 이 연구는 프로리다대학, 보스톤아동병원, 네델란드의 울트레크대학 등을 포함하여 전세계의 많은 연구자들이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널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는 과거 20년간 이루어진 죽음의 과정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의 발전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인간이 생물학적인 존재로서 뿐아니라 영적인 존재임을 재교육할 필요성이 지대합니다. 건강관리의 위기, 권위의 상실, 경제를 파탄시킨 탐욕자들, 무주택자들이 많다는 국가적 수치심 등을 포함한 우리사회의 엄청나게 많은 문제점들이, 우리가 서로 상호의존해야 하는 영적존재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빛에 안기어"는 우리에게 각자의 인생이 중요하며 커다란 의미가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죽은 다음에 하나님의 빛속에 들어갔다 온 사람들이 "사랑은 지고(至高)하다. 사랑으로 다스려야한다. 우리의 생각으로 우리의 환경을 바꿀 수 있다. 우리는 인생을 풍요롭게 살면서, 자기가 수행한 창조적인 일에 기쁨을 느끼며,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며,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우리의 인생을 발전시키고 극대화하기 위해 이곳에 보내졌다."고 하는 단순하고 아름다운 메세지를 듣고 충격 받곤 합니다. 베티는 의학적인 죽음에서,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라는 위대한 임무를 띠거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기적의 능력을 받고, 되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사랑하라는 단순한 메세지를 갖고 왔을 뿐입니다. 근사경험의 의미는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한다. 우리는 친절하고, 인내하며, 관대한 봉사를 해야한다."는 것과 같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과 우리가 잊고 살았던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 책은 우리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하고도 경이스러운 이야기로, 근사경험에 대한 교과서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근사경험을 해본 적도, 내 자신의 몸을 쳐다보는 영적 경험도 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내게 하는 이야기에 의구심이 많았었습니다. 특히 의심이 가장 많이 가는 부분은 육체로부터 이탈한다거나, 죽음이 즐겁다는 것이었습니다. 베티 이디 여사의 책은 경험의 여러 단계들을 기술함으로써 이런 의구심을 씻어주는 굉장한 기록입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녀가 죽자, 그녀는 그의 몸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 나는 에너지파가 밀려오고 내 안에서 무언가 터져 빠져나가는 느낌을 느꼈습니다. 나의 첫 느낌은 내가 자유로워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경험에 부자연스러운 감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그녀의 인생에 대해 중요한 것들을 가르쳐줄 안내영(안내천사)들을 만났고, 가족과의 관계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녀가 죽음속으로 전이(轉移)되는 것을 도왔습니다. 그녀는 어둠속으로 들어갔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갔습니다. "나는 이것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이보다 더 평온한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그녀의 경험은 사람들이 내게 수년동안 근사경험에 대해 질문한 데 대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 질문은 나로선 결코 대답할 수 없었던 것들입니다. 그녀는 인생의 모든 것을 되돌아 보았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자신에 의해서 심판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부정적인 근사경험의 의미와 원인에 대해서, 왜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경험으로 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왜 인생에 고달픈 일들이 많은지, 왜 선한 사람에게 나쁜 일들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그녀는 왜 죽은 사람들이 자기 시체로 돌아가기를 싫어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몸의 귀챦은 무게와 차가움에 혐오감이 들었어요. 나는 영적인 자유의 기쁨을 만끽한 후에, 다시 육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고 그녀는 말하고 있습니다. 베티는 어린애였을 때도 이런 경험을 하므로써 근사경험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린이들은 단순하고 순수한 근사경험을 하고도, 종교적 또는 문화적 기대감과 현실의 차이로 고통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른들이 하는 것처럼 그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숨기지도 않고, 하나님을 본 것에 대한 영적인 뜻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도 없습니다. 나는 다섯살 난 소녀가 부끄러운듯 내게 말한 것을 잊지 못합니다. "나는 예수님과 이야기 했는데, 그분은 아주 친절했어요. 그분은 내게 아직 죽을 때가 안됐다고 말했어요." 어린이들은 근사경험에 대해서 어른들 보다 훨씬 많은 것을 기억합니다. 근사경험의 결과로, 자신들의 영성이 성인과 같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그들이 어른에 되어 또 다른 근사경험을 하게 된다면, 더욱 강력하고 완전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베티 이디 여사는 우리에게 근사경험의 중요성은 그것이 우리의 삶에 대해 가르쳐 준다는 것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사람에게 영이란 것이 없으므로, 사후의 생이란 없다고 결론 지은 게 불과 수백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죽음에 대한 부자연스러운 공포감을 갖게 했고, 이런 생각이 우리의 삶에 침투해 우리가 풍요한 인생을 살지 못하게 했습니다. 베티는 우리에게, '죽음은 영적이다'라는 진리가 우리에게 죽고 싶은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더욱 완전하게 살려는 욕망을 준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이 실재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바로 이 우주적인 힘을 믿게되자, 나는 우주를 창조한 사랑스런 존재를 보았습니다...."라고 그녀는 말합니다. 한 꼬마소녀가 죽었을 때, "나는 새로운 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배웠다고 내게 말했습니다. 그 애는 내게, 주일학교에서 천국에 대해 배웠지만 정말 믿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애는 죽었다가 살아나서, "나는 이제 죽는 것이 무섭지 않아요. 왜냐하면 죽음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죠."라고 했습니다. 그 애는 그렇다고 다시 죽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생은 살기 위해 있고, 빛은 미래를 위해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나는 그 애의 경험이 어떻게 그 애를 그렇게 변하게 했는지 물었는데, 그 애는 한참 머뭇거리더니 "훌륭하게 되는 것은 훌륭한 것이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빛에 안기어"는 우리에게 같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친절하다면, 우리는 기쁨을 갖게될 것입니다." 베티는 예수님께 "제가 왜 이런 것을 전에 몰랐었죠?"하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너는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 먼저 슬픔을 알아야한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이 간단한 말은 내가 인생을 이해하는 방법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말은 내가 전에 알았던 것이고, 사실 나는 그것을 내 온 생애 동안 들어왔던 것입니다. 나는 베티의 책을 읽은 후에 내 인생이 이 책으로 인해 바뀌었으며, 내가 알았었지만 무시해왔던 간단한 진리에 따라서 살아야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베티는 아메리카 인디안으로서, 어릴 때 기숙학교에 다녔습니다. 학교 앞에는 "비젼이 없는 사람들은 파멸한다."라고 쓴 표지판이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우리의 영적 믿음과 비젼에 대해 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우리가 죽음에 대해 만든 잔혹한 혼란속에 빠뜨립니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환자들은 친척이나 친구와 함께가 아니라, 차디찬 기계와 함께 병원에서 몰래 죽어갑니다. 우리는 죽음이 우리의 정상적인 삶의 부분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죽음에 대해 잊고 살았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잊고 있었습니다. 죠세프 캠벨이란 신화학자(神話學者)는, 약물남용에서부터 도심에서의 폭력에 이르는 우리 현대의 많은 문제점들이 영적인 비젼의 총체적 결핍에 기인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영의 중요성을 잊고 살아 가고 있습니다. "빛에 안기어"에는 위대한 비밀이 담겨있습니다. 이 비밀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대한 예언자들과 영적 지도자들이 수천년동안 우리에게 가르치려 했던 것들입니다. 베티 이디 여사는 그것을 근사경험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것은 또한 여러분의 인생을 변화시킬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멜빈 모올스, 외과의사
목 차 ---------------------------------------------------------- 책머리에 ............................................................................................. i 목차 ..................................................................................................... vii 첫날밤 ................................................................................................. 1 밤은 깊어가고 ................................................................................... 10 둘째날 ................................................................................................. 15 죽음 ..................................................................................................... 20 터널 ..................................................................................................... 26 빛에 안기어 ....................................................................................... 28 법칙들 ................................................................................................. 39 치유와 죽음 ....................................................................................... 45 베틀과 도서관 ................................................................................... 53 정원 ..................................................................................................... 57 축하연 ................................................................................................. 60 수 많은 세계 ..................................................................................... 63 몸을 선택함 ....................................................................................... 66 술취한 남자 ....................................................................................... 73 기도 ..................................................................................................... 77 남자들의 평의회 ............................................................................... 81 이별 ..................................................................................................... 91 귀환 ..................................................................................................... 93 회복 ..................................................................................................... 99 나의 특별한 천사 ............................................................................ 102 역자의 변 ......................................................................................... 112
첫날 밤 무언가 잘못되었다. 나의 남편 죠는 불과 수분 전에 병실을 떠났으나 벌써부터 좋지 못한 예감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그날 밤을 홀로, 나의 가장 두려운 일을 맞이할 밤을 나홀로 지새울 것이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나의 마음속으로 엄습해왔다. 예전에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왜 지금은 이런 생각이 그렇게도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일까? 1973년 11월 18일 저녁이었다. 나는 자궁적출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하였다. 일곱 아이를 둔 어머니인 나는 서른한살로 건강한 편이었으나, 이 수술을 받으라는 의사의 권고를 따르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남편과 나는 모두 이 결정을 하면서 편안한 느낌이 들었었다. 나는 이 결정에 대한 편안함은 여전했으나, 지금은 무언가 다른 것이,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오랜 결혼 생활동안 우리는 밤을 떨어져 지낸 적이 거의 없었다. 나는 가족을 또한 그들과 함께 했던 특별한 친밀함을 회상하려 애써보았다. 우리는 여섯 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지만(한 명은 애기였을 때 죽었다) 그들을 혼자 있도록 하는 것이 싫었다. 때문에 우리 부부가 데이트를 할 때에도, 우리가 집에 있으면서 자녀들이 우리의 데이트를 위해서 계획을 세우도록 하였다. 때때로 그들은 우리를 위해 거실에 촛불을 켜고 벽난로에는 폭죽을 터트리며 저녁을 차려 주었다. 그들은 우리 수준에 맞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대로 분위기에 맞는 음악도 마련해 틀어주었다. 나는 그들이 그 날 저녁 찻상 위에 장식을 곁드리고, 중국식 요리를 차려놓고, 또한 함께 앉을 수 있도록 큰 방석을 마련해 주었던 것을 회상하였다. 그들은 전등을 약하게 켜놓고, 우리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주고는, 계단을 서둘러 올라가면서 재잘거리면서 웃는 것이었다. 죠와 나는 지상의 천국이 바로 이곳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죠와 같이 사려깊고 사랑스러운 남편을 만난 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른다. 그는 내가 입원하기 전에 나와 함께 하기 위해 휴가를 얻었고, 회복할 동안 한 주일 더 집에서 보내기로 하였다. 그와 14, 15살된 우리의 두 큰 딸들은 멋진 추수감사절 만찬을 계획하고 있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더욱 더 무겁게 나를 엄습해왔다. 아마도 그것은 그 방의 어두움, 소녀시절 나를 공포로 몰아 넣었던 그 끔찍한 어두움 때문일 것이다. 혹은 이 불길한 느낌은 한 경험, 아직도 의문과 놀라움으로 가득 채우는 몇해전 병원에서의 경험에서 비롯될 수도 있을 것이리라.
내가 네 살 때 나의 부모님께서 이혼하셨다. 아버지는 "세상에 백인이 인디안 여자와 결혼한다는 것보다 더 고약한 일은 없을 꺼야."라고 얘기하곤 하셨다. 그는 빛깔 좋은 머릿결을 가진 스코틀랜드계 남자였고, 어머니는 순수한 수우족 인디언(Sioux)이었다. 열자녀 중 일곱번째인 나는 부모님이 이혼하기 전에 부모님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다. 결국 어머니는 인디안 보호구역으로 돌아 갔고, 아버지는 시내에 사시는 할아버님에게로 가셨다. 그 때 우리형제들 중 여섯은 천주교 기숙학교에 들어 갔다. 기숙학교에서의 첫 겨울이었다. 나는 심한 기침과 계속되는 오한으로 시달렸다. 나는 마흔 명의 소녀들과 한 방을 썼는데, 하루는 내 침대를 놔두고 언니 조이스의 침대로 기어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함께 누워 울었다. 나는 심한 열을 참지 못해 울었고 그녀는 나를 염려하여 울었다. 언니 중 한 명이 저녁 불침번을 서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내가 흘린 땀으로 습하고 차가워진 나의 침대로 데려다 주었다. 조이스는 언니에게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알리려 했으나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마침내 나는 이틀후 저녁에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 의사는 내 병을 백일해와 폐렴으로 진단했고, 간호사더러 우리 부모에게 연락하라고 말했다. 나는 내가 그날 저녁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심한 열로 고통을 받으면서 잠을 설쳤다. 한 번은 내 머리 위에 손길을 느꼈을 때, 간호사가 나에게 기대어 나를 쳐다보며 서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이 애는 정말 어린데"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에서 느꼈던 친절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더욱 더 이불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고 따뜻하고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말은 나를 평온하게 해줬고 나는 눈을 감고 다시 잠이 들었다. 나는 의사의 말에 눈을 떴다. "너무 늦었어요. 그녀는 죽었어요." 그리고 이불이 머리위로 끌어올려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당황했다. 왜 너무 늦었을까? 나는 머리를 돌려 방안을 돌아보았고, 이불이 나의 얼굴을 덮고 있었을뿐, 방은 하나도 이상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의사와 간호사가 침대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병실을 두리번거리며 그전보다 더욱 밝은 빛을 감지했다. 침대는 나에게 거대하게 보였다. "나는 이 하얗고 거대한 침대에 놓인 하나의 작은 갈색 벌레와 같구나"라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 때 의사는 사라지고 가까이에 다른 사람이 있음을 깨달았다. 갑자기 나는 침대위에 누워있지 않고 누군가의 팔에 안겨있음을 발견했다. 눈을 들어 하얗고 아름다운 수염을 가진 남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음을 알았다. 그의 수염은 아주 멋지게 보였다. 수염은 그 속에서 나온 밝은 빛으로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킥킥 웃으며 그의 수염에 손을 집어 넣고 손가락에 수염을 감아 보았다. 나는 아주 평온했고 그와 함께 있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그는 부드럽게 나를 품에 안고서 흔들었고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애기가 다시 숨을 쉬어요!" 간호사는 소리쳤고 의사는 다시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러나 그 방은 다른 방이었다. 나는 아주 어두운 더 작은 방으로 옮겨졌던 것이었다. 그 흰 수염을 한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내 몸은 고열로 불덩이가 되어 있었고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 나는 몹시 무서웠다. 의사는 불을 켰고 전에 있던 방으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부모님이 도착했을 때, 내가 죽을 뻔 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줄곧 거기에 있었는데 어떻게 죽을 수 있었지? 하여간 흰 수염을 한 남자처럼,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님과 함께 있게 되어 좋았다. 나는 그들에게 그 남자가 누구이며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물었으나,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들에게 의사가 너무 늦었다고 얘기했던 것을 말해 주었고, 하얗게 빛나는 수염을 가진 사람이 와서 나를 안아 주었다고 말했으나,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경험은 나의 어린 시절에 사랑의 오아시스처럼 소중히 간직되는 나만의 것이 되었다. 기억은 결코 변하지 않았고 그것을 기억할 때마다 내가 그의 품 안에서 느꼈던 행복과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어둠이 방으로 스며들어 올 때, 나는 이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부모님과 떨어져 있었던 그 어린 시절 이후로, 나는 늘 어둠을 두려워 하게되었다. 이제 다시 어둠 속에서 홀로 되어, 방안에 가득한 이상한 느낌을 감지하고 있었다. 죽음이 내 주위에 소용돌이 치는 것 같았다. 내 생각은 죽음으로 채워졌고, 그것에 사로잡혀 있었다. 죽음. 죽음과 하나님. 이 둘은 영원히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죽음 저 편에서는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내가 내일 죽는다면 무얼 보게 될까? 영원한 죽음? 복수(復讐)의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될까? 확실히 모르겠다. 또 하나님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저 학교에서 어린 시절에 배웠던 것과 같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나는 아직도 거대한 벽돌담과 어둡고 차가운 방이 있는 나의 첫번째 학교 건물을 기억한다. 쇠사슬로 된 담이 남녀 기숙사를 갈라놓고 또 다른 담이 학교 주위에 둘러쳐 있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직도 나는 오빠가 어떤 건물로 끌려가고 언니와 내가 다른 건물로 인도되었던 바로 그 첫날 아침을 기억한다. 마지막으로 한 번 우리를 돌아볼 때 그들의 눈 속에 숨어있는 공포감을 절대 잊어버릴 수 없다. 나의 심장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와 두 언니는 작은 방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수녀는 우리들에게 이를 잡기 위해 살충제를 뿌리고 머리를 잘랐다. 그 다음 그들은 우리에게 1주에 한 번 갈아 입도록 색깔이 다른 단색옷 두벌을 주었다. 이 교복은 학교서 도망치는 애들을 찾기 쉽도록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씨스'라고 부르는 큰 언니 텔마는 우리와 분리되어 나이가 많은 소녀와 함께 있도록 하기 위해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그 첫날 저녁 조이스와 나는 다른 소녀들과 줄을 서 있다가, 수녀들이 호각을 불자 우리의 방으로 행진해 들어갔고, 침대 옆에 서 있어야 했다. 그 다음 우리는 곧바로 침대로 들어갔고, 불은 꺼졌으며, 문은 밖에서 잠겨져 버렸다. 방안에, 이렇게 크고 어두운 방안에 갇혀있는 것은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어둠 속에서, 공포속에서 기다리다가, 나는 마침내 고맙게도 잠이 들어버렸다. 일요일에는 모든 어린이들이 교회에 참석하였는데 그곳은 나와 언니들에게 예배당 뒷편에서 오빠들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내가 쏟아져 나오는 소녀들을 통해 바로 그 첫번째 일요일에 오빠들을 보려 애쓰고 있을 때 누가 내 머리를 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주위를 돌아보았고 마침내 끝에 고무공이 달린 긴 막대를 보았다. 수녀들은 이 기구를 교회에서 우리의 행동을 바로 잡는 데 사용하였다. 이것은 바로 내가 경험한 많은 것 중에서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나는 벨소리가 무엇을 의미하고 언제 내가 무릎을 꿇어야 하는지를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자주 막대로 맞아야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오빠들을 볼 수 있었고, 오빠를 만나려면 고무공으로 맞아야 됐는데 오빠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아픈 것은 문제가 안되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에 대해 배웠고, 여태껏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많은 것들에 대해 배웠다. 또한 우리 인디안들은 이교도와 죄인으로 불리웠고 물론 나는 그것을 믿었다. 수녀들은 하나님의 눈에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였고, 그들이 우리를 돕기 위해 그곳에 있다고 배웠다. 언니 텔마는 자주 수녀들로부터 작은 호스로 매질을 당했고, 다음에 그렇게 한 수녀들에게 감사하도록 강요당했으며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는 또 다른 매가 기다리고 있게 되었다. 나는 수녀들이 하나님의 선택된 종이라고 믿었고, 이들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굉장히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에 대해 배운 모든 것들이 이러한 공포를 더욱 증폭시켰다. 하나님은 화가 나있고 참을성이 없으며 매우 힘이 있는 분이라고 여겼으며, 이러한 생각은 바로 그는 나를 없앨 수 있으며 심판의 날이나 내가 그를 만나기 직전에 곧바로 나를 지옥에 보낼 것이라 여겼다. 학교에서 배운 하나님은 내가 결코 만나고 싶지 않은 그런 하나님이었다.
나는 큰 벽시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죠가 떠난지 불과 몇 분밖에 되지 않았다. 몇 분 밖에. 방안의 세면대 위에 있는 작은 불빛이 진한 그림자, 즉 나의 과거로 부터 악몽처럼 나의 상상속에 걸려 있는 그림자를 만들어 내기에 충분하였다. 나의 마음은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고독에 의해 힘을 얻어 나의 마음은 어두운 기억 저편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평화를 찾기 위해 마음을 제어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않으면 그날 밤은 끝이 없을 것이었다. 나는 홀로 침잠하여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을 애써 찾으려 하였다. 이 때, 한 줄기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브레이너드 인디안 훈련학교는 웨슬리 감리교파에 의해 운영되었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 학교 건물 앞에 "비젼이 없는 사람들은 파멸한다."라고 쓰여 있는 큰 간판을 읽었던 것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물론 그것이 우리 인디안들을 두고 한 말이었으며, 또한 이곳이 훈련학교였으므로 더욱 더 많은 비젼을 갖기 위해 여기에서 훈련받는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인디안이나 개는 사절"이라고 적혀 있는 문구를 시내에서 보았을 때 더욱 굳혀졌다. 브레이너드 인디안 훈련학교는 나에게 전에 있었던 학교 보다는 긍정적인 경험을 주었다. 우리는 아늑하고 홀가분한 분위기를 즐겼고, 선생님들은 학생들과 함께하는 것을 감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하나님이 사람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비쳐진다는 것을 배웠다. 전에 알았던 노한, 복수심에 가득찬 하나님 대신에 여기 있는 분들은 우리가 행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욱 즐거워하신다고 가르쳤다. 예배모임에서 사람들은 자주 아멘과 할렐루야를 외쳤고 나는 그들의 갑작스런 외침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렸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경배하는 방법이 다름을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은 여전히 내가 죽어 그 앞에 섰을 때 나를 벌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여름동안 난 루터교회와 침례교회에 참석했고 때때로 구세군에도 참석했다. 내가 다닌 교회에서는 내가 참석한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 성장하면서 커져갔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역할이 뭔지, 나이를 먹어가는 동안 나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확실히 알지는 못했다. 나는 기도로 응답을 얻고자 그에게 다가갔으나 그가 나의 말을 듣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의 말은 단지 공중에 흩어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열한살이었을 때 용기를 가지고 학교 보모에게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지를 물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라도 진실로 알고 있다면 그녀도 그러할 것이라고 느꼈었다. 그러나 나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나를 때리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어떻게 의심을 가질 수 있느냐고 했다. 그녀는 나에게 무릎을 꿇게했고 용서를 구하도록 기도하라고 했다. 기도했으나 그 때는 신앙심의 부족--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 것--때문에 지옥으로 가게될 것으로 알았다. 아니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여름이 다 지나갈 무렵 나는 아버지에게 돌아갔고 두려움으로 나를 마비시켰던 경험을 하게 되었다. 어느날 밤 잠자리에 든 후 나는 창문의 커튼을 열고 별과 지나가는 구름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즐겨 해왔던 것이었다. 갑자기 구름에서 한 줄기 하얀 빛을 감지했고 나는 두려움으로 얼어버렸다. 그것은 누구를 찾는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생각했고 힘껏 소리쳤다. 나는 그가 도둑같이 밤에 오셔서 의로운 사람을 데려가고 악한 자들을 불태우실 것이라고 배웠다. 아버지가 오랜 시간 나를 진정시켰고 마침내 마을에서 축제가 있음을 알리는 광고용 불빛이라며 나를 달래주었다. 그것은 내가 여태껏 보지 못한 불빛이었다. 나는 커튼을 닫았고 한동안 별빛을 바라보는 일을 하지 않았다. 진정한 하나님을 찾는 일은 계속되었다. 나는 여러 종파의 교회를 참석했고 신약에서 많은 경전 귀절을 암기하고 있었음을 기억한다. 나는 사람이 죽으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의로운 사람과 승천하시는 부활의 날까지, 영은 몸과 함께 무덤에 남아 있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이것을 자주 생각했고 여전히 나의 죽음과 곧이어 찾아들 어두움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었다.
밤은 깊어가고
병실의 커튼은 닫혀 있었다. 내가 닫았던가? 나는 시계를 다시 한번 보고는 일어나서 시계가 가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기 때문에.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었다. 아마도 간호사가 와주거나 집에 전화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팔을 뻗어 전화기를 집어 들었고, 잠시후 신호가 가자 열다섯살난 우리의 딸 도나가 받았다. 그녀는 즉시 내가 괜찮은지를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날 염려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나는 그녀에게 모든 것이 좋으나 조금 외롭다고 말했다. "아빤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그녀는 말했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나는 그와 몹시도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엄마 괜찮아요?", 그녀는 물었고, 나는 "그래 괜찮아."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실은 "제발 아빠를 최대한으로 빨리 이리로 모시고 오너라!"하고 말하고 싶었다. 나의 걱정은 커져만 갔다. 나는 수화기를 통해 작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엄마와 얘기하고 싶어!", "야 전화 이리줘!", "아빠한테 일를꺼야!" 그리고 집에서 나는 그 소리들은 나를 더욱 편안하게 해주었다. 나는 그 후 30분동안 모든 아이들에게 잘 자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수화기를 놓자마자 외로움이 이불처럼 다시 나를 감쌌다. 방은 더 어두워 보였고 집까지의 거리가 마치 백만마일이나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의 가족은 그 자체가 나에게는 생명이었고 그들과 떨어져 있는 것은 나를 공포에 떨게하고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나의 자녀들과 남편 생각이 다시 떠오르자 한결 나아졌다. 그 순간 이 세상 누구도 불과 몇 시간 후에, 내가 그들이 있는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상관하지 않음을--사실 나는 그들에게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을 빌고 있었음을--알 수 없었으리라.
나는 남편과 자녀들이 내가 어린 시절 잃어버렸던 가족과의 생활을 결국에는 보상해줄 것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내가 결혼하여 가정을 갖게되면 그들은 나의 가장 큰 관심사이자 피난처가 되도록 하겠다고 내 자신에게 약속했다. 또한 남편을 사랑하고 언제까지나 그와 함께하며 자녀들이 항상 우리를 의지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내 자신에게 약속하였다. 내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성숙한 아가씨는 기숙학교에서나 아버지와 함께가 아니라 어머니와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한편 어머니는 하루종일 일을 하셨으므로 애기 볼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나의 막내동생을 돌보면서 집에 머물러 있었다. 매일 집에서 빈둥거리면서 아침 저녁 이웃 집 아이들이 학교에 오가는 것이나 지켜보는 내 자신이 불쌍하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때는 교육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완전히 깨닫지 못했으나,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는 친구와 다른 형제 자매와의 교제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어 나는 여기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결혼하여 가족을 갖는 것이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나의 삶이 다른 사람의 필요사항에 의해 조정되고 어떠한 개인적인 행복에 대한 권리를 잃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내 소유의 옷과, 내 소유의 침대, 그리고 내 소유의 가정을 원했다. 살아가면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언제나 나를 사랑해줄 신뢰할 수 있는 남편을 갖고 싶었다. 이럴 때 옆집에 사는 소년과 무작정 사랑에 빠져 다음해 봄에 결혼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완고하게 반대하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와 함께 살고 있었으므로 나를 도와 주셨다. 나는 열다섯 살로 아주 순진했으므로 진정한 가족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우리 둘은 이런 미숙함과 서로 다른 인생목표를 갖고 있었으므로 우리의 결혼은 6년 후에 끝이 났다. 나의 꿈은 깨어졌고 나의 영혼은 상처를 입어 이를 치료하려면 많은 인내와 사랑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나는 결코 이 결혼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네 명의 아름다운 자녀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두 딸은 도나와 셰릴, 다음은 아들 글렌, 그리고 막내 딸 신디아는 병으로 3개월을 못넘기고 죽었다. 내가 지금의 남편 죠를 만난 것은 이혼한 그 다음해 크리스마스날 무도회에서였다. 그는 네바다주 리노시 근교에 있는 스테드 공군 기지에 근무하고 있었다. 죠도 역시 이혼하였고, 나는 그를 알게 되면서, 우리는 서로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나와 비슷한 배경을 갖고 있었고 유대감이 강한 가정을 갖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 꽤 어울리는 것 같았다. 심지어 나의 아이들조차 나보다도 더 그와 함께 살기를 원했고, 그래서 우리의 결혼은 더욱 빨리 성사되었다. 우리의 신혼 생활은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죠에게는 내가 전에는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그런 따스함이 있었다. 그는 아이들에 대해서 굉장한 인내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완고한 편이어서, 아이들은 그를 몹시 따랐다. 아이들은 그가 밤에 퇴근할 때면 누가 제일 처음 그를 맞이하는가로 싸우곤 했다. 처음부터 죠는 모든 면에서 그들의 "아빠"였다. 우리는 함께 있기를 원했고, 바로 그 소망이 우리의 성숙함과 어우러져 오랫동안 우리를 결합해주는 접착제 구실을 했다. 우리가 이리저리로 이사를 다니고 우리의 삶에 적응해 나가면서, 우리는 그 댓가가 얼마건 간에 우리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항상 가족이 먼저였고 우리 자신은 그 다음이었다. 1963년 7월, 죠는 텍사스주의 산안토니오에 있는 란돌프 공군기지로 전속하게 되었다. 이때쯤 컴퓨터가 막 등장해서, 죠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우도록 임무를 받았다. 우리가 4년간 텍사스에 있는 동안, 아들 둘(조셉 이세와 스튜어트 제프리)을 낳았다. 우리의 꿈은 실현되고 있었다. 우리는 새 차와 에어콘이 완비된 새 집을 갖게 되었다. 자녀들의 옷은 넉넉했고, 나는 집에서 그들을 돌볼 수 있게 되었다. 정말로 축복받은 삶이었다. 그때는 마치 기숙학교 때나 어린 시절의 외로움, 결혼의 파탄과는 판이하게 다른 안정과 기쁨을 누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무엇인가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따라다녔다. 계속 기도는 했지만,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멀고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분께서 가끔가다 나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이를테면 이혼 뒤에 사랑과 인내심으로 가득 찬 누군가를 만나 내가 자녀를 키우는 것을 돕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문자 그대로 죠를 만나게 해 주셨으니까.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의 자녀를 사랑하신다고 믿었다--그분이 복수심으로 차신 분이더라도 말이다--하지만 나는 내가 어떻게 그분의 사랑을 나의 삶에 적용시키고 나의 자녀들과 나눌 수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죠와 이 문제에 관해 상의했고, 결국 함께 교회에 다니자고 제의했다. 그는 종교에 관해 별로 좋지않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달가와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입장을 존중하는 한편 우리 가족이 더욱 강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우리는 몇몇 동네 교회에 참석했지만 만족스럽지 못했고 얼마뒤엔 모든 것을 묵과하게 되었다. 수년간 나는 종교에 관한 확신 없이 지냈다.
간호사가 들어오는 바람에 나의 생각들이 흩어져 버렸다. 그녀는 내게 수면제를 복용하라고 했지만 나는 모든 종류의 약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거절했다. 아주 오래전 부터 나는 약을 싫어했고, 차라리 두통이나 병을 참을지언정 아스피린 조차도 복용하지 않곤 했다. 간호사는 나갔고, 나는 다시 내 생각속에 빠져들었다. 말할 수 없는 고독에 쌓인 채 이번엔 몇시간 남지않은 수술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모든 일이 잘 될까? 나는 수술대 위에서 죽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나도 그렇게 될까? 묘지의 광경이 내 머리속을 가득 채웠다. 묘비와 관 안에 들은 해골의 목에 걸린 십자가가 떠 올랐다. 나는 어린 시절 장례식에 관해 들었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나는 왜 죽은 사람들 목에 십자가를 걸까 생각해 보았다. 하나님께 우리가 성도임을 보이기 위함일까? 아니면 그들이 지옥의 악마들로부터 보호가 필요한 죄인이기 때문일까? 우울함이 엄습해오기 시작했고, 어둠은 계속 나를 짖눌러서 나는 호출단추를 눌러 간호사를 불렀다. 나는 그녀가 들어왔을 때, "지금 수면제를 복용할 수 있을까요?"하고 물었다.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보았지만 곧 약을 갖다 주었다. 나는 약을 받아들고 불을 끄고 나가는 간호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잠시 뒤에 졸음이 몰려왔고, 마침내 나는 짧게 기도하고 잠이 들었다.
둘째 날
커튼 끝으로 햇살이 비집고 들어오며 아침은 제법 빨리 왔다. 수술은 정오로 잡혀있었다. 일어나서 몇 시간을 기다릴 수도 계속 잠을 즐길 수도 있었다. 수면제 때문에 취한 것 같기도 했고 아니면 전날밤의 공포감과 불안감으로 인해서 지쳤는지도 모르겠다. 이젠 아침을 맞이하는 밝은 방에서 긴장을 풀고 내가 지난번에 병원에 있던 그 때를 생각해 봤다. 그 때 느낀 두려움에 비하면 간밤의 공포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이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는 있었으니까.
죠는 1967년에 공군에서 전역했고, 우리는 그가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직업들을 찾아보았다. 컴퓨터는 새로운 산업으로 부상하고 있었고, 그가 받은 교육 덕택에 그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새로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이 어느 지역인지만 결정하면 되었다. 결국 우리는 죠가 일할 큰 항공우주회사가 있는 태평양연안 북서부쪽으로 이사 가기로 결정하였다. 뜨겁고 건조한 텍사스의 날씨와는 달리 그곳의 날씨는 좋을 것 같았다. 게다가 북서부에 살고 계시는 나의 아버지와 새 어머니를 찾아뵐 수도 있었다. 우리가 이사한지 얼마되지 않아 나는 일곱번째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사실 이 임신은 우리가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가 잘 돌볼 수 있을 만큼 많은 자녀--그때의 다섯 아이들--를 가졌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다시 임신하지 않도록 주의했었다. 지난 여섯번의 임신으로 나는 허약해져 있었고, 의사들은 아이를 갖지 말도록 권유했다. 임신 삼개월째가 되자 심한 경련과 출혈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의사들은 내가 태아 조직을 배출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들은 이 증상과 다른 합병증 때문에 내가 곧 유산할 것이 틀림 없다고 믿었다. 출혈이 계속됨에 따라 나는 일주일간 병원에 입원을 했다. 우리는 자연유산이 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태아가 유산되지 않을 것이 명백해졌고, 의사는 낙태를 하는 것이 어떨지 권유했다. 그는 만약에 그 아이를 낳는다면 분명 태아 몸의 어떤 부분인가가 없이 태어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를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죠와 상의를 한 후에 우리는 수술을 받기로 했다. 낙태 수술을 하기로 한 전날 다른 의사들이 나를 검사했고 계획했던대로 수술을 하는 데 동의했다. 마지막 의사가 나가며 내게 말을 건냈다. "왜 저 작은 친구가 거기서 계속 살아 매달려 있는지 알 수 없군요." 나는 소름이 끼쳤고,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러면 안돼. 너는 이 아이를 낳아야만 해. 그는 태어나기를 원하고 있어." 그날 저녁 죠가 병문안을 왔을 때, 나는 의사들이 무어라고 말했는지 설명해 주고, 이 아이가 태어나야만 한다는 나의 느낌을 말해 주었다. 우리는 낙태를 시키지 않고 있다가 결국 불구 아이를 낳는 것에 관해서 이야기 하였다. 우리 둘 다 그러길 원치 않았지만, 내가 지금 이 아이를 낙태시킨다면 평생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죠는 우리가 이 아이를 낳아야만 한다는 것에 동의했고, 그날 밤 우리는 의사들을 만나 우리의 느낌을 이야기하였다. 그들은 어떤 의사도 임신을 계속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들은 이 일에 관여되는 것 조차 거부했다. 다음날 나는 퇴원했고 그런 나를 받아줄 의사를 찾기 시작했다. 결국 수년간 공군에서 복역하다가 개인 병원을 개업한 젊은 의사를 찾아내었다. 죠처럼 공군 출신이었던 그는 우리에게 친밀감을 느꼈고, 나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는 그 아기가 살아날 확율이 있다고 봤지만, 그 역시도 아기가 불구로 태어날까봐 걱정하였다. 그는 나에게 계속 누워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내가 무엇을 해야하고 말아야 하는지 목록을 작성해 주었다. 죠와 아이들은 집안일을 나대신 훌륭히 처리해 주었고, 나는 그 시간을 더욱 많은 것을 배우고 고등학교 수료증을 따는데 주력했다(역자주: 미국에는 가정에서 독학해서 수료증이나 자격증을 딸 수 있는 제도가 있다). 시간은 유수같이 흘러 출산예정일이 코앞에 다가왔고, 나는 점점 두려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기가 몸의 한부분이 없는 불구로 태어나던지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다고 자녀들에게 미리 잘 얘기해 두었다. 죠와 나는 "저 작은 친구가 거기서 계속 살아 매달려 있어요"라고한 의사의 말을 상기하며 서로를 진정시켰다. 그때는 아기의 아버지가 분만실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던 때였으므로 내가 아기를 낳을 때 죠가 가까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병원측은 분만할 때 죠가 나와 함께 있어도 좋다고 했으나, 그가 만약에 기절을 하거나 구토를 하더라도 수술중에는 내가 급선무이므로 그를 돌볼 수 없다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죠는 그런 일이 일어나도 병원측에 책임을 돌리지 않겠다는 동의서에 서명을 해야했다. 1968년 6월 19일, 진통이 시작 되었고 나는 입원을 하였다. 너무나 겁에 질려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분만실에서 죠는 내 손을 잡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내 옆에 서 있었다. 그도 의사들처럼 푸른 가운을 입고 하얀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그의 청회색 눈은 나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마스크 뒤로 거칠게 내쉬는 그의 숨소리는 그도 나만큼 겁에 질려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분만이 시작되자 우리는 손을 꼭 잡았다. 아기가 나왔을 때 나는 의사들의 눈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동안의 두려움과 걱정이 모두 한ᆫ |